미국 대학원 생존기

미국 대학원 박사과정 3년차의 터닝포인트 - 퀄 시험 (Qualifying/Preliminary Exam)

ahrom.insights 2025. 1. 2. 12:00

박사과정들이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미국에서 5-6년 정도의 박사과정이라면 대게 3년 차 때 퀄 시험 혹은 프리림 (Qualifying/Preliminary Exam) 을 보게 되어있다. 이 시험을 통과를 해야 Ph.D. Student에서 Ph.D. Candidate으로 승격이 된다. 말 그래도 이제 박사 과정을 계속할 수 있는 자격을 준다는 거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때 하는 생각은 비슷하다.

 

아직까지 우리과에서 통과 못한 사람은 없다던데...
내가 그 통과 못한 사람 1호가 되면 어쩌지?

 

 

퀄 시험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1. 연구 프로포졸 (Research Proposal) 제출: "졸업 논문에 이런 연구를 해서 넣을 겁니다."라는 걸 적어서 내는 일종의 연구 계획. 보통 과마다 사용하는 템플릿이 있고 가능하다면 선배들에게 첨삭을 받는 걸 추천.

2. 세미나 (Seminar/ Department Talk): 과 전체의 사람들에게 오픈되는 세미나 형식의 50분 가량의 발표. 이어지는 질의응답 역시 세미나 참석한 사람들 이리면 누구나 질문할 수 있다. 내용은 내 연구 프로포졸에 담긴 내용을 발표하는 것.

3.  커미티 질의응답 (Closed-door Q&A): 영문으로 "문을 닫고", 즉 비공개로 진행하는 커미티 교수님들이 2시간동안 질문을 미친 듯이 퍼붓는 질의응답 시간. 이게 퀄 시험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 통과를 못한다면 여기서 탈락.

 

 

사실상 연구 프로포졸은 교수 재량이고, 세미나는 프로포졸을 PPT로 만들고 정말 죽어라 연습하면 그만인 것이지만 문제는 바로 3번, 커미티 질의응답이다. 내 연구 프로포졸 안에 있는 내용과 관련이 있다면 그 어떠한 질문을 해도 되고 나는 질문을 받고 바로 말로 답변을 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내가 하는 연구는 우리 몸에 있는 면역 세포 중 하나인 B cell이 항체를 만들때만 만들어내는 단백질이 있다. 이 단백질이 신기한 건 우리의 DNA를 아예 잘랐다가 다시 붙이는 과정을 시작하는데, 이 문장 안에서 교수님들이 나에게 물어볼 수 있는 예상 질문은 다음과 같다.

 

"B cell의 성숙 과정을 설명하라."
"B cell이 없으면 우리 몸의 면역은 어떤 영향을 받느냐"
"그 단백질이 없어진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DNA repair (수리)는 어떻게 이루어 지면 그 과정에 어떤 단백질들이 무슨 일을 하는가"
"네가 동물 실험을 한다고 치자. 그리고 너에게 필요한 모든 돈과 자원이 있어. 그렇다면 너는 현재 하려는 연구를 어떻게 다시 계획을 짤 거냐"
"DNA 구조를 다 그려봐라"
등등등

 

이렇듯 정말 다양한 방향에서 온갖 질문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교수님이 어떤 질문을 할지 모르니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1-2년 차 때 들은 수업들을 다시 복기하며 기초적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 모든 지식을 내 머릿속에 때려 박는 일과 동기들과 선배들을 데리고 최대한 많이 연습을 해보는 것이였다. 

대학원 2년 차 2학기부터는 정말 열심히 준비를 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조언 3가지를 소개를 해보자면:

1. 모르면 모른다고 말해도 괜찮다. 단, 연관된 다른 지식을 꼭 이야기하라. 예를 들면, "DNA repair (수리)는 어떻게 이루어지면 그 과정에 어떤 단백질들이 무슨 일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내가 모르는 부분들이 존재를 한다면, 솔직하게 "내가 a, b, c는 지금 기억이 안 나지만 x, y, z는 설명가능하다."

2. 웬만해서는 떨어뜨리지 않는다. 그리고 설사 3개 중에 하나를 탈락한다고 해도 재시험의 기회가 있으니 너무 쫄지마라.

3. 커미티 교수님들은 너를 갈구려고 온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너의 편인 사람들이다. 

 

준비한 시간과 많은 사람들의 조언과 격려가 무색하게 난 프로포절과 세미나는 통과, 커미티 질의응답은 불합격이었다. 재시험을 봐야 했다.

그런데 교수님들의 피드백이 조금 의외였다. 그냥 단순히 내가 못해서가 아니었다. 나와 학부 때부터 친분이 있어서 내가 커미티에 모신 교수님이 나서서 말씀을 해주셨다. 

난 너를 오래 봐와서 알아. 네가 오늘 나온 모든 질문을 답할 수 있는 학생이라는 거.
하지만 말이야, 넌 그냥 얼어버렸어.
지금 네가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박사생으로서, 연구자로서
네가 학회에 발표를 한다거나, 강의를 한다거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을 거야.
그런 사람이 겨우 5명 앞에서 얼어버렸어.
우린 네가 이걸 극복해 내길 바라.
그래서 불합격을 주는 거야.


이런 것까지 신경을 쓰시는구나. 정말 내가 잘 되길 위하는 마음에 불합격을 주신거구나. 불합격이었지만 조금 안도했다. 내가 멍청해서 아니라, 내가 바보같이 대답해서가 아니라, 나의 지적 부족함보다는 정신적 부족함이었구나. 이건 내가 열심히 하면 고쳐지지 않을까?라고 잠시 생각했다.

 

사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극심한 무대 공포증에 시달렸다.

 

왜인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고등학교때부터 시작된 무대 공포증은 퀄 시험을 보는 날까지도 이어졌었다. 가뜩이나 멀쩡한 사람도 얼어붙어 버릴 만한 퀄 시험에 무대 공포증이라니... 그래서 동네 한국 마트에서 청심환을 하나 사다가 먹고 세미나를 했었다. 문제는 이 청심환이 질의응답 때 약효가 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얼어버렸던 것. 분명 질문에 답변을 하긴 했는데 너무 긴장을 한 나머지 질문을 받고도 한참을 생각해야 했고 끝나고는 내가 어떤 답변을 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그때 위에 코멘트를 해주신 교수님께서 한 가지 조언을 주셨다. 바로 베타 차단제(beta blocker)를 처방받아보라는 것. 자신도 한때 너무 긴장하면 먹었었고 많이 교수들이나 대학원생들이 너무 긴장할 때 처방받아먹는다고 알려줬다. 

 

베타 차단제란?
교감신경의 베타수용체를 차단하여 심장 박동수와 심근 수축력을 감소시키는 약물로 혈압을 낮추고 심장의 부담을 줄여주기 때문에 고혈압, 관상동맥질환, 심부전, 부정맥 등의 치료에 주로 사용된다. 
정신과에서는 광장공포증이나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 등의 여러 불안장애에도 사용이 된다.
나처럼 무대 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은 무대 위로 올라가면 긴장과 공포의 호르몬인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떨리는 신체 반응이 생긴다.
베타 차단제를 복용하면 아드레교감신경의 베타수용체를 차단하여 심장 박동수와 심근 수축력을 감소시키니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손이 떨리는 증상이 줄어든다.

 

그래서 이 베타차단제가 나의 무대 공포증을 치료해 주길 바라며 처방을 받으러 갔다. 하지만 정신과약이라 무조건 카운슬링 센터를 통해 정신적 상태를  평가받은 다음에 정신과적 상담을 받아야 한다는 판단이 나와야 의사를 만날 수 있다는 거였다. 귀찮지만 어쩔 수 없다며 카운슬링 센터로 갔다. 그리고 이 일이 나에게 정말 큰 터닝포인트가 되었다.